릴케(Rilke)의 가을날(Herbsttag) : 자연의 성숙과 고독한 인간에 보내는 아름다운 선물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1. 릴케(Rilke)의 시, 가을날(Herbsttag)에서 다루어진 ‘가을날(Herbsttag)’에서 보여준 문체
릴케(Reiner Maria Rilke)는 독일이 낳은 20세기 최대 시인중의 한명으로 릴케의 시는 독일어권만이 아니라 한국, 일본등에 소개되어 많은 이들의 칭송과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릴케의 시를 접하게 되는 계기는 우리의 고교시절 고교교과서에 실려 있어 그의 아름다운 시가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릴케의 시를 읽어 나가면서 느끼는 감흥은 그가 매우 내면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의 싯구 자체가 부드럽고 전혀 난해하지 않고 누구나 평범하게 사용하는 일상어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릴케(Rilke)가 그가 살고 있던 동시대의 사람들과 동떨어진 삶을 산 것이 아닌 그가 일상적으로 접하고 만나고 대화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교류를 한 것임을 간접적이나마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의 시의 가장 큰 특장은 아주 평범한 일상어로서 그의 내면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우리의 삶에서 누리는 가장 큰 감흥은 우리들의 일상에서 누리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난해한 암호와도 같은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기호와 부호들로 가득찬 그들만의 표현이 아니라 이웃집 선남선녀들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간결하지만 명료하고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솔직담백한 내용입니다. 이에는 그토록 어려운 기교나 화려한 수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일부 시인, 소설가, 문학자들이 사용하는 복잡다단한 기교, 화려한 수사, 불필요한 비틀림과 같은 것은 극히 일부 매니아들이 선호할 수 있어도 일반 대중들에게 커다란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릴케(Rilke)의 시는 간단명료하고 담백하며 일상인들이 다가갈 수 있는 평이한 용어로 이해하기 쉽고 다가가기 쉬워 그만의 특장입니다.
2. 신과 자연의 섭리에 대한 릴케(Rilke)의 내면세계
릴케(Rilke)의 시 ‘가을날(Herbsttag)’에서 릴케가 자신이 독실한 신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신이 주관하는 자연의 세계를 그만의 방식으로 신과 자연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음을 간접적인 은유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을날(Herbsttag)의 첫 시작인 ‘때가 왔습니다(Herr: es ist zeit)’로 시작하는 싯구는 바로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독실한 신자로서 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싯구의 첫 문장은 이후 그의 시 ‘가을날(Herbsttag)’에서 전체적인 그의 내면의 세계가 어떠한가를 암죽지형태로 그의 시 전체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어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Der Sommer war sehr gross)’로 이어가는 연결은 힘들고 더운 여름이라도 신의 은혜로 여겨 여름조차도 신이 자신에게 주는 하나의 선물로 여겨 위대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힘들고 견디기 힘든 계절조차도 릴케(Rilke)에게는 은혜입니다. 그에게 여름은 풍요함을 상징하는 가을로 가는 하나의 필요한 여정으로 여름의 뜨거운 햇빛이 만들어내는 결실의 과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름날의 견디기 힘든 뜨거운 햇빛이 없다면 다가올 가을날의 풍요로움을 노래하게 하는 수많은 열매와 주렁주렁 달릴 무거운 포도송이가 없다는 점에서 여름이 주는 의미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조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또한 릴케는 독실한 신자로서 이러한 여름이 자연에게 주는 열매와 포도송이에 가져다 주는 풍요로움을 신의 조화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릴케(Rilke)는 신에게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모든 조화를 주관하는 신인 당신이 당신의 그늘을 해시계위에 내리게 하고 벌에는 바람을 일게 해달라라고 합니다. 사실 자연의 존재로서 열매와 그의 일부인 포도송이는 여름내내 뜨거운 햇빛과 수많은 벌들의 수고로움이 없다면 결실의 존재가 없습니다. 가을이 올지라도 가을이 주는 풍요로움은 없습니다. 때맞추어 해시계에 신의 그늘을 적당히 하여 햇빛을 알맞게 하여 결실에 도움이 되게 하고 또한 바람을 일게 하여 열매와 포도송이가 무르익게 하는 자연의 존재를 고마워하며 이는 신의 은혜라는 점을 릴케(Rilke)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릴케의 시 가을날(Herbsttag)은 자연에 대한 자신의 감흥을 담은 서정시이면서 여름날 불어오는 바람과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과 날아다니는 벌들이 있는 한폭의 회화를 보는 듯한 풍경화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릴케는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이 바라보고 바라는 여름날을 그리고 있습니다. 언어로 그린 그림입니다. 릴케(Rilke)는 여름을 지나 다가올 풍요로운 가을날을 위하여 다시금 신에게 간청을 합니다. 자연의 조화를 좀더 부리어 마지막 열매들을 살찌게 하고 보다 더 성숙한 열매를 위하여 ‘이틀만의 남쪽의 날’이 내리도록 자연에게 명하라고 합니다. 보다 큰 성숙함을 위하여 성숙의 시간을 좀더 달라고 합니다. 포도송이에도 단맛을 더욱더 나게 해달라고. 풍요로움을 위한 릴케(Rilke)의 간절함이 보여집니다.
3. 릴케(Rilke)가 그의 내면에 간직한 신과 자연의 조화
릴케의 시 ‘가을날(Herbsttag)’은 시의 전반부에서 가을의 풍요로움을 기대하면서 자연의 조화를 주관하는 신에게 간청하는 그의 내면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후반부에서는 가을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난후 가을이 주는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이제 집없는 자는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집이 없는 자는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을 것인가. 릴케가 보기에 여름이 주는 가을의 풍요로움을 가지는 자는 이미 부족함을 느끼지 않기에 자기가 가진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신이 주관하는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을 사실상 거역하는 존재로 봅니다. 이 하나의 문장으로 릴케가 신이 주는 자연의 조화로움에 감사하며 이를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자연의 조화를 해치지 않는다는 릴케(Rilke)만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얼마나 소박하고 자연과 신에 감사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간단한 언어로 표현한 한 문장이 한문장이상의 의미와 감동을 주며 릴케(Rilke)가 가진 내면에서의 자연와 신의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합니다.
4. 가을이 주는 고독과 인간의 존재
이제 여름을 지나 다가온 가을을 릴케(Rilke)는 노래합니다. 가을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난 이후의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추수가 끝난 가을날 추수라는 작업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위하여 떠나고 난후 홀로된 자신을 발견합니다. ‘혼자인 사람은 또 그렇게 오래 홀로 남아서(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라고 노래합니다. 이는 추수가 끝나 텅빈 들판에서 홀로된 자신을 발견하는 우리네 늦가을 풍경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을이 주는 풍요로움 뒤에 오는 홀로된 고독감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절절히 느끼게 합니다.
이는 추수가 끝난 텅빈 들판을 눈앞에서 생생히 그리는 풍경화입니다. 이 싯구가 나타내는 현대적 의미인 고도의 산업화로 인한 풍요로움을 누구나 누리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그 물질적 풍요로음 뒤에 다가오는 고독감이 그대로 오버랩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현대 물질사회가 주는 풍요속의 고독이라 할까요. 릴케는 풍요뒤에 다가오는 고독을 어떻게 해소하려고 할까요. 릴케(Rilke)가 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렇게 오래 남아서 잠 못 이루고 책을 읽거나 긴 편지를 쓴다고 합니다.
가을이 주는 고독은 가을내내 오래도록 이어지며 잠을 못이루게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이유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고 난후 왜 눈물이 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는 지극히 평범한 하나의 일상을 그대로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고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기나긴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이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그리되는 모양입니다.
5. 고독을 이기기 위한 내면의 처절한 노력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의 밤은 더욱더 길어집니다. 기나긴 밤에 고독감이 더해지고 밤새도록 잠못 이루게 됩니다. 그리하여 고독감을 이기기 위하여 스스로 책을 읽거나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게 됩니다. 비록 밤새 편지를 쓰고 난후 이를 버릴지라도. 이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평소에 읽지 않은 책들을 다시 꺼내어 다시 읽어보거나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그려보기 위하여 오로지 자신을 위하는 마음으로 구겨진 편지지에 아무렇게나 글을 써내려가는 경험들입니다. 이로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스산한 가을날 길거리를 거닐게 됩니다.
비록 아무도 나를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도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면서 하염없이, 목적없이 걸어가는 경험입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벌거숭이 가 된 나무들이 쭉 늘어선 가로수길을 홀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주는 스산한 풍경들입니다. 이 풍경들은 가을날 우리들 주변에서도 자주 보여집니다. 릴케(Rilke)는 가을로 인하여 무수한 나뭇잎들이 떨어진 가로수길을 무거운 마음으로 소요하고자 합니다(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aetter treiben). 릴케(Rilke)도 우리네와도 같은 모양입니다.
6. 홀로 선 나자신 발견
스산한 가로수길을 무작정 걸어간다고 하여도 우리들 내면에 있는 고독감이 사라지지 않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스스로에게 조그마한 위로를 가져다 줍니다. 이 세상은 그래도 살아갈 만한가를 자문자답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후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대책없는 해법을 주곤 합니다. 이를 릴케(Rilke)는 ’무거운 마음으로‘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간인 우리는 타고 날 때부터 홀로 이 세상이 등장합니다.
비록 쌍둥이로 태어난다고 하여도 이 세상에는 홀로 등장합니다. 이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본질적으로 홀로됨을 의미합니다. 붓다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것과 상통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홀로 그의 인생을 살아 갑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고독을 이기기 위하여 부모, 형제, 친구등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떠한 형태든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고독한 인간들이 고독감이 주는 무서움과 처량함을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비록 독실한 신자인 릴케(Rilke)마저도 가을이 주는 고독을 이기기 위하여 그러한 매우 인간적인 노력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됩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입니다.
랭보(Rimbaud)의 취한 배((Le Bateau ivre)에서 나타난 랭보의 내면세계